주말 - 1

  1. 2019.10.21 주말의 의미 1

 

주말도 이제 다 지나간다. 오늘 오전에 빨래를 개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말에 기대하는 것도 바뀌었구나.'

 

예전에 뭘 기대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일요일엔 교회를 다녀오면 시간이 거의 다 가버렸기 때문에 주말이란 토요일 하루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마저도 행사나 약속이 없는 토요일은 흔치 않았다. 오후에 일정이 있다면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빨래나 청소 등의 집안일을 한 뒤 나갔다 오면 하루가 끝난다. 오전에 일정이 있다면 주 중과 다름없이 서둘러 집을 나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말이란 비록 출근은 하지 않지만 내가 보내고 싶은 모양으로의 시간이 아닌 그냥 그렇게 무엇인가로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생각해보지도 못한 것 같다. 기껏 해봤자 이번에 개봉한 무슨 영화 보고 싶다 정도.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지가 벌써 십수 년이기 때문에 딱히 그게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았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그게 조금 달라졌다. 1년 동안 한국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에 그전엔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아니 당연한지 당연하지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많은 생활 습관들이 전부 초기화되었다. 시간, 공간, 관계 등 모든 것이 갑자기 다른 세계로 옮겨갔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다시 돌아와서 마주하게 되는 한국 사회,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 사회의 많은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연하게 살아온 나의 모습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주말이다.

 

여행하는 동안 그 어떤 일정도 채워져 있지 않았던 백지 같은 하루하루가 주 5일 출근해야 하는 날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 중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단 이틀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그리고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절감했다.

 

참 애석한 일이지만 나는 빠르게 주 5일 노동자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다. 성실한 노동자이자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월~금 9시~6시는 내가 아닌 일에 나의 시간을, 아니 나의 자아를 내어준다. 그 시간 동안에는 일과 상관없는 영역에서의 나의 생각, 나의 욕망, 나의 취미, 나의 몽상, 나의 딴지, 나의 기쁨과 슬픔은 잠시 지워진다. 게다가 지워진 나라는 것이 6시가 지났다고 하고 바로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이던가. 한 시간의 퇴근길 동안에도, 남편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까지도 잘 돌아오지 않는다.

 

매일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좋아하는 책을 읽을 시간, 한 줄 일기를 남길 시간이 도무지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1시간 단위로 국영수사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등학교의 시간표처럼 빠르게 모드를 전환하여 저녁 시간을 쓰는 것은 내게는 버거운 일이다. 매일 핸드폰 어플로 하는 스페인어 공부와 내일의 삭신을 책임져 줄 스트레칭 정도만 겨우 하고 있다.

 

풍과 함께 우리 최소한 일요일만큼은 아무 일정도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현대인이라면 이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일정이 없는데도 일요일에 만나자고 하는 사람을 거절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 누군가 일요일에 만나자고 한다면 무슨 말로 거절하는 게 좋을까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다행히도 오늘은 우리 둘 다 아무 일정을 만들지 않는데 성공한 날이었다. (이러다 영영 이게 너무 쉬운 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좀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제는 왠지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둘이 얘기를 했고 오늘은 한국에 돌아온 뒤로 가장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점심을 해먹고 거실에 널려 있던 빨래를 걷어 개다가 저 생각이 든 것이다.

 

자느라 없어져 버린 오전 시간까지 아까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동네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지. 블로그도 써야지. 책도 읽어야지. 작은방에 달고 싶은 커튼도 알아봐야지. 지난 일주일 동안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사느라 내 머릿속에 등장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지극히 사적인 생각들을 꺼내봐야지. 이게 바로 주말이구나. 이게 바로 내가 주말에 기대하는 것이구나. 주말이란, 휴식이란, 안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내 몸에 느껴지는 감각이 여행을 할 때의 그것과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그리고 기뻤다.

 

앞으로 내 일상이 더 바빠진다면 이마저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같아서는 주 5일 출근에, 주 1~2회 정도 저녁 일정에, 토요일 하루 일정 정도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 바쁨이다. 이 이상 내 시간을 무언가에 내주기는 싫다. '나는 나구나. 내가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을 되살릴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사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내년에 대학원을 가게 된다면, 1~2년 사이에 육아를 하게 된다면, 일주일에 딱 하루 온전히 내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떡하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2019. 10. 21. 22:21.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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