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8

  1. 2019.10.30 궁금하면 직접 해봐야지 뭐
  2. 2019.10.21 중국과 홍콩
  3. 2018.01.22 애증의 동료
  4. 2017.11.24 만 30세가 된 밤, 프레이리를 만나다
  5. 2017.10.14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것은 무엇일까?
  6. 2017.01.17 두 집 살림
  7. 2016.12.11 대표기도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들
  8. 2016.12.06 남편의 미래는 남편의 것

 

한참 동안 고민해오던 대학원 진학에 대해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이거다 싶은 확신이 들지 않아서 할까 말까를 엄청 망설였었다. 기교연 연구원들과의 대화 이후 내가 정말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부 전공도, 교수님도 내가 하는 것처럼 검색 정도로 알아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리고 얘기를 듣다 보니 국내 대학원이 매우 폐쇄적인 곳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원을 하기도 전에 미리 교수님을 만나서 인사를 드리는 게 좋고 그렇게 미리 컨택을 한 학생과 교수가 이야기가 잘 맞으면 그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교수가 애를 쓰기도 한다고 한다. 그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와서 내가 배우고 싶은 교수님들을 알아보고 컨택해보기에는 시간도 너무 촉박하고 혹시나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교수를 마주치게 되면 그냥 기분이 많이 우울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결국 올해 대학원 진학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방송통신대 교육학과에 편입을 준비해보려 한다. 학비도 싸고 업무와 병행 가능하고 혹시 이후에 교육학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자 할 때 여러모로 가교 역할이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타 전공자이기 때문에 교육학에 대한 기초가 없으니까 학부과정만 이수해도 지금보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나름대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리서치로서의 의미도 있다. '나름대로' 기획 회의를 하는데 부딪힌 문제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방송대의 교육의 질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직접 경험해보기로 했다. '직접 해보기'가 우리 팀의 공식 기획 절차가 될 것 같은 예감.

 

브라이스 캐니언 여행 중에 병구쌤의 '나름대로' 구상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너무 발칙한 상상이라서 머리가 어질하고 두려운 마음이 컸는데 언젠가부터 담담해지고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어제 간담회에 참석하셨던 꽃친 부모님들의 표정도 무척이나 담담해서 다른 참가자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새삼스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개혁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직접 궤도를 벗어나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가지는 상상력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아파트의 이름 앞에 소중한 결혼 계획을 내려놓는 사람들과의 차이만큼이나 클까.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 골고루 섞어 배낭에 꽂고 광화문으로 나서는 신실한 장로님들과의 차이만큼이나 클까. ㅇㅇ한 것들은 죽여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과의 차이만큼이나 클까.

 

세계여행 1년이면 대단한 현자는 아니어도 조금은 현명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나다. 꽃친 전후로 바뀐 게 없다는 세준이의 말이 진정 진리인가 보다.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강박이고 그걸로 내 경험의 긍정적인 면을 증명해야 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꽃친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꽃치너들도 어쩌면 자기 최면적 대답에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된다. 누군가 계속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주면 통쾌하겠다.

 

젠장! 망할 놈의 변화 좀 그만 물어봐요. 하고 싶었으니까 한 것뿐이고 아무 나쁜 일도 안 생겼다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예요.

 

 

 

 

 

2019. 10. 30. 00:07.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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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홍콩에 저지르고 있는 일에 관심이 많이 간다. 물론 엄연히 중국 땅이었지만 영국 식민지가 되는 동안 중국과 많이 달라져 버린 홍콩.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 않았으려면 애초에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지 않았거나, 반환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홍콩과 홍콩의 사람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다.

 

여행을 하는 동안 중국인들을 조금 만났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패키지여행을 하기 때문에 중국인 여행객들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깊이 사귄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중국에 대해 뭘 더 알게 되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쉐삥을 만나서 함께 여행하고 사귀긴 했지만, 그녀는 베이징에 사는 의사로서, 엘리트 중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게 아쉽다.

 

싱가포리안인 송하고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지. 송은 아마도 중국계 싱가포르인 같은데 중국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고 싱가포르 다음으로 중국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중국인들이 중국의 엄청난 국가주의에 대해 반감이 없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마 송으로부터 받은 것 같다. 싱가포르도 경제적으로는 매우 선진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독재에 가까운 국가 주도적 나라인데 50대 후반의 나이인 송은 이에 대해 나라가 하는 일에 너무 반대해서는 발전을 할 수가 없다며 젊은 세대들을 비판했다.

 

어딜 가나 떼로 몰려다니는 중국인들, 그리고 여행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문화를 그냥 가지고 와서 오히려 현지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는 느낌이 중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폐쇄적 국가주의를 엿보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본 다큐멘터리 "American Factory"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미국의 시선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폐업한 미국의 공장을 사들여 재가동시키고 그로 인해 지역 경제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왔던 중국 회사. 그러나 그들은 자본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노동자들, 관리자들, 그리고 중국의 노동 문화까지 미국에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큰 갈등을 일으켰다. 근로 시간 준수, 노동 환경 안전, 민주적 의사교환 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중국의 노동 문화. 미국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재밌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국인들이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회사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중국인 직원들은 중국에 있을 때 이 회사의 일자리 덕분에 먹고 살 수 있었다. 이 회사가 성장하고 발전하여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급여를 주기 때문에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고, 결혼할 수 있었고, 자식을 기를 수 있었다. 그러니 회사가 계속 성장하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 말고 중요한 것은 없었다.

 

중국인들이, 중국이 너무나 궁금했다. 왜냐,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게다가 우리나라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어서 중국의 홍콩 길들이기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중국이 홍콩에 대해 범죄인인도 법을 통과시키려 하는데 이에 반대하는 홍콩 사람들인 시위가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이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6월 경 절정에 달했던 이 시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는 소식과 홍콩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롤 모델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10월이 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해결되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한 사태로 번져가고 있다. 홍콩 시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고 홍콩 정부, 그리고 그 배후의 중국 정부는 대화를 통한 갈등의 해결이 아닌 무력 진압으로 대응하고 있다. 페친 중에 한 분을 통해 시시각각 홍콩의 상황을 엿보고 있는데 늘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의 사진이 올라온다. 매 시위마다 부상자, 아니 사상자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외신 기자가 홍콩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북한처럼 통제 사회도 아닌 곳에서 이런 잔인한 폭력이 대놓고 자행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더욱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런 비인도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국 정부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압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약소국들의 비민주적인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 서방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한다. 얼마 전 홍콩을 지지하는 발언을 SNS에 올린 미국 NBA 휴스턴 로키츠 팀의 감독으로 인해 NBA가 중국의 거센 보이콧을 당했다. 스폰서 철회, 불매 운동, 중계 취소 등. 중국이 거대한 소비력을 가지고 타국가들을 협박하기 때문에 중국의 비민주적, 비인권적 행태를 비판할 수 있는 국가, 기업이 없는 것이다. NBA가 해당 감독뿐만 아니라 협회까지 나서서 중국에 사과한 것을 두고 미국 정계에서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진행이 될지 궁금하다. 

 

한편, 중국이 소비력을 무기로 타국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 국민들이 중국 정부의 입장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이다. 홍콩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타국의 기업, 타국 정부에 대해 중국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분노하지 않고서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중국인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왜 모르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됐다. 어제 천안문 사태에 대한 유튜브 한 편을 시청했다. 공산당 독재 치하에서 업악당하던 중국 국민들이 대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군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끔찍한 학살만을 남기고 실패했다. 그 뒤로 중국 정부는 천안문 사태에 대한 모든 자료를 삭제하고 인민들에 대한 국가주의 사상교육을 더 강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인들 중에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막대한 경제적 위협을 감수하고 중국의 인권탄압을 비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 기업도 없다. 무엇이 중국의 야망과 폭주를 막고 주변국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 나는 중국 국민들의 각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생각 아닌가? 하지만 중국 국민들이 천안문 사태의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민주화 운동을 일으키려면 정말 큰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현재와 같은 경제 발전의 분위기와 중화사상의 자신감 속에서는 자신들의 인권이 파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 변화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진행되는 것 같다. 큰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인류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현재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최대한의 윤리 의식과 양심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설득할 뿐이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에게도 그 양심이 존재할 것이고 각 사람의 양심과 양심에 근거해 위험을 무릅쓰는 실천하는 행동들이 또 다른 잠자고 있는 양심을 깨울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이 아닐까.

 

2019. 10. 21. 22:04.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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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돔을 다닐 때 내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동료였다. 아무리 스타트업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일하지만 엄연히 누군가는 사주이고 나는 고용된 직원인데 동료라는 말로 그 구조를 무효화시키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회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 "예지씨는 동료예요, 직원이에요? 동료이고 싶으면 동료로 대접해주고 직원이고 싶으면 직원으로 대우할게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그 단어에 대한 혐오감이 가장 피크를 찍었던 때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위즈돔을 떠날 때까지 그 부정적인 인식은 바뀌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동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다가 동료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는다. 


동료라는 건 뭘까? 그 단어를 미워하는 마음에는 졸업 직후 마땅히 뜻을 세우지 못하고 어리버리했던 나를 회사로 끌어들이고는 책임은 져주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감정이 단순한 원망을 넘어서서 나를 아득한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더 큰 이유는 자립할 수 없었던 다른 누군가를 위즈돔에 끌어들이고 책임지지 못한 내 모습이 자꾸 생각나기 때문이다. 내 머리속에서 조차 그들 앞에 나는 떳떳할 수가 없었다. 


위즈돔은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그 동안 위즈돔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솔직히 모임에 가기 직전까지 마음이 많이 심란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문 닫은게 뭐 좋은 일이라고 이렇게 모여서 먹고 마시자고 하나 싶기도 했고 내가 남몰래 원망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하나 정말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회사를 지켰던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웃으면 나도 마음을 놓고 웃으며 우리의 한 시절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의 마지막을 지켰던 그들은 그 날도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며 음식을, 물건을, 사람들을 챙겼다. 다행히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내 마음도 생각보다 좋았다. 옛날 사진들이 인화되어 있었다. 언제 이런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나 가물가물했다. 사진 속의 내 모습, 우리들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위즈돔에서 일하는 동안 항상 고민스러웠고, 갈팡질팡했고, 잘 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었던 것만 같은데, 사진 속의 나는 꽤 즐거워보였다. 처음부터 이 사업은 잘 될 수 없는 사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일에 청춘을 바친 우리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3년 전의 그 시간, 이 사진 속 그 장소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썩 소중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동료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금 다시 그 상황에 처하면 여전히 나는 동료이기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나고나니 고맙고 미안하고 소중하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는 보편 진리의 한 줄기일 수도 있겠다. 



2018. 1. 22. 22:26.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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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0세가 되었다고 해서 거창하게 글을 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우연히 감기에 걸려 하루 종일 집에서 자면서 쉬는 바람에 새벽이 되도록 잠이 오질 않아 결국 한 줄 글을 남기게 되었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드디어 펼쳤다. '페'로 시작하는 네 글자 단어라서 페미니즘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전혀 그 어원을 짐작하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며, 피스모모에서 '우리는 페다고지를 표방한다'라고 선언해서 더 멋져 보이기도 한,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페다고지. 

오늘도 결국 본론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 30주년 기념판에 붙인 서문만 읽었다. 페다고지의 원 제목은 '피억압자들의 교육학'이라고 한다. 브라질 빈민가 출신인 파울루 프레이리는 평생을 교육을 통한 빈민해방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제3세계 뿐만 아니라 더 기술화된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어서 본론을 읽어보고 싶다!! 파커 팔머에 이어 나의 위대한 스승님이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꽃친을 운영하면서 고민되었던 많은 부분들에 나름대로 기준을 세울 수 있도록, 최소한 제대로 된 고민의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것 같다.

뒤늦게 이렇게 교육학이 재밌을 줄 몰랐다. 뭐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짜여진 커리큘럼을 따라가기 보다는 내가 갈증을 느끼는 지점에서 하나씩 배워가는 게 더 감격적이다. 역시 배움의 가장 좋은 원동력은 필요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에 반대하면서 동의한다. 배움의 때는 목마를 때다! 

그나저나 새벽 4시가 다 되어 간다. 내일 잘 일어날 수 있겠지. 


잊기 전에 메모해두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것인데, 꽃친의 1년은 '경험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UX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까? 하지만 일반 경험디자인과 다른 점은 디자이너가 모두 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와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점이겠지. 이 부분을 좀 더 정리하면 꽃친을 운영하는데도 유용할 뿐 아니라 꽃친과 비슷한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그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데도 나는 틈틈이 어떻게 노하우를 전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어차피 꽃친에서 감당할 수 있는 아이들은 1년에 10명 내외이다. 우리의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들레 씨가 날아가듯이 여러 곳에 생각이 퍼져서 자라나야 한다. 미리 잘 정리해두었다가 때가 오면 멋지게 전달해야지. 

2017. 11. 24. 03:53.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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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다. 지도 위 나의 좌표를 모르며, 바라보는 방향을 모른다.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정확한 질문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왜 가야 하는가?


꽃친 아이들 코칭 시간에 여는 질문으로 '내가 나에게 궁금한 것은?'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지금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고 적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답은 내 안에 있을 것 같기 때문에 나에게 그것이 궁금하다.'라고 설명했다. 

지금 내 옆에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난다. 배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는 한, 가야 하는 이유가 없는 한, 많은 기회는 오히려 혼란을 줄 뿐이다. 조바심이 나게 할 뿐이다. 


어디로 가려 하는가? 

왜 가려 하는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2017. 10. 14. 00:18.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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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아니 사실 예전부터 집은 마련해 놓았는데 본격적으로 두 집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미디엄이라는 글쓰기 플랫폼과 티스토리 두 군데에 글을 쓰려고 한다. 티스토리는 누가 봐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보여줄만한 글들은 아닌 것들, 혹은 굳이 잘 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글들을 쓰고, 미디엄에는 개중에 그래도 좀 공유하면 좋을만한 생각들을 조금은 더 신경써서 적어보려고 한다. 쓰고 나서 읽어보고 문장을 다듬어 보기도 하고. 


현실은.. 이거나 저거나, 어느거 하나에라도 꾸준히 쓰면 다행.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좀 손에 익었으면 좋겠는데. 출산과 육아라는 한계시점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저항할까, 수용할까. 

2017. 1. 17. 01:06.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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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오늘 제가 잠시 후에 있을 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문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오늘 아침에 남편과 싸운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합니다. 이런 화나는 마음을 가지고 온갖 경건한 말들로 기도문을 쓰는 건 거의 불가능입니다. 그렇다고 대표기도 자리에서 남편과 싸우고 속상한 제 마음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 겸 자기반성을 여기에다 풀어놓고나면 기도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을 쪼개서 하나님께 제 시시콜콜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남편과 싸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갑자기 왜 싸우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먼저 불편한 감정을 느꼈고, 누가 먼저 말 실수를 했으며, 누가 누구의 말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제 생각엔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고, 남편이 먼저 화를 낸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살짝 정색하는 정도입니다만, 저는 '화'로 정의합니다.) 이럴 때 남편은 곧장 진상규명을 하고 싶어합니다. 

"자 예지야, 생각해봐. 너가 이러이러한 말을 했잖아. 그 말이 이런 상황에서는 나한테 어떻게 들리겠어? 저러저러하게 들리는거야. 너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의 '논거'로 들리는거지."

'논거'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얘기하면 그놈의 '논거' 된통 당하기만 할 것 같아서 차라리 입을 다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격을 시전합니다. 얼마 전 꽃친 혜진이를 상담하는데 분명 저에게 불만이 있는것 같은데 아무 말 하지 않는 혜진이 앞에서 답답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지금 꼭 제가 혜진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혜진이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사실 이건 오늘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어제, 혹은 그 전부터 있었던 일이나 느꼈던 감정들 때문에 일어난 현재완료형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친구네 집 집들이를 다녀왔는데, 그 집 남편이 요리를 했습니다. 아, 요리를 한 남편이 제 친구입니다. 원래 옛날부터 요리하는걸 좋아했어요. 결혼한 다른 친구 커플도 왔는데 그 집도 남편이 요리를 합니다. 요즘은 역시 남자가 요리하는게 대세인가 보라며 남편들이 부엌에서 뭘 하는지 자기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우리집 남편은 요리기능은 없는데..'라고 말해놓고는 혹시 그렇게 말한 친구들이 무안할까봐, 그리고 스스로 위로도 할겸 '대신 화장실 청소 기능과 빨래 기능이 있지'라고 말했어요. 어제 맛있는 요리를 대접한 제 친구는 요리는 잘 하는데 빨래 기능이 없어서 본인 스웨터를 아기 옷처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그래, 모든 가정의 모습은 다르다, 우리집은 심지어 남편이 집안일을 조금 더 많이 한다라는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달랬지만 친구가 해 준 요리가 넘나 맛있어버려서... 제가 집에 가야해서 나오는 순간까지 그 친구는 양파를 열심히 볶으며 듣도보도 못한(분명히 맛있을..) 요리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람에.. 12시가 거의 다 된 시간에 집에 들어온 아내를 꾸벅꾸벅 졸다가 맞이한 우리집 남편에게 "A가 요리를 했는데 참 맛있었어. B네 집도 맨날 남편이 요리한대."라는 말을 여러번 한 모양입니다. (아니, 정확히 기억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하철에서 그 얘기를 왜 또 하게 되었죠? 이건 생각이 잘 안납니다. 여튼 남편은 어제 들은 그 이야기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겠죠. 눈치 없는 제가 별 생각없이 몇 마디 더 얹었다가 분위기.. 안 좋아져 버렸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를 다른 가정의 남편과 아내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은 정말 최악입니다. 잘 알고 있는건데, 그래서 어제 같은 일이 있더라도 '아, 음식 참 맛있다'라고 생각하는데서 그쳐야지 '아, 부럽다. 나도 남편이 이런 요리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부당하고(!!!) 더군다나 그걸 남편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 배려심 없는 아내죠. 네, 저도 압니다. 그런데 내가 배려한답시고 내 마음을 너무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A처럼 맨날 요리를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나도 남편이 해주는 요리를 먹고 싶다~'라는 정도의 메세지인데 애교로 받아들여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 심술쟁이 마음이 늘 이겨 버립니다. 그러고는 항상 남편을 속상하게 만들고, 그러면 나는 남편을 속상하게 만든 나를 자책하면서 정작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남편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하는 킹왕짱 아내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왜 이모냥인가 싶어서 자존감도 낮아집니다. 내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느라 또 정작 남편 마음은 뒷전입니다. 이게 저라는 사람의 현재까지의 한계겠죠. 


하나님, 저는 그래도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자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나봅니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인격이 바닥수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독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아마 이제는 낳아준 엄마보다도 남편이 이런 제 모습을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꼬집어서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럴때마다 눈감아주고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적절한 말로 저를 북돋워주는 남편에게 늘 고마워해야 하는데, 내 모습은 바꿀 생각을 안하고 남편의 작은 실수에는 늘 불만이 가득합니다. 내가 잘못한건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니가 나한테 어쩔건데~ 식의 마음가짐은 증오하는 김기춘이나 마찬가지의 마음가짐인데, 제가 남편한테 참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네요. 

이런 모습이 저절로 좋은 아내의 모습으로 바뀌진 않겠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연습을 해야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이런저런 가르침들에는 왠만해선 콧방귀도 안 뀌는 저이니 '자기계발서'등을 읽는다고 도움이 되진 않겠지요. 그래도 제가 살면서 하나님 말씀은 잘 들은 편인 것 같아서 이번에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저 그래도 이렇게 마음 먹은 정도만 해도 잘한거죠? 이제부터 부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신비로운 성숙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코칭을 받아 하나하나 잘 해나갈 수 있겠죠? 




2016. 12. 11. 13:02.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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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목사다. 남편과 나는 결혼 전부터 같은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나니 교인들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까마득히 어린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그래서 결혼한 다음날 교회를 갔을 때 앞에 나와 소감을 이야기해 달라셔서, 남편이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를 길게 했으니 나는 간단히 하고,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는 남편을 통해 우리 교회 교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니 사모님 보다는 예지 자매, 예지 집사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다고. 잘한 일도 아니고 못한 일도 아니고 그냥 내가 원하는 바였고, 우리 교회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그 정도는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여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나는 남편의 직업으로 인해 내 인생이 정의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 전, 친정 엄마는 남편의 직업이 목사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 자유롭지 못할까봐 많이 걱정하셨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답 안나오는 교회에서 답 안나오는 목회를 할 타입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하시는 엄마 앞에서 늘 당당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재미있게, 새롭게 살거라고. 


어느 덧 결혼한지 3개월이 지나고 신혼기도 안정에 들어섰다. 어색하고 쑥쓰럽고 집에서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던 시기를 조금 지나고 나니 이런저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머리속에 생겼다. '철들면 늙는다'를 신조로 삼아 어디서나 철없음을 무기로 삼는 나이지만, 여전히 함께 만들어나가고 싶은 꿈 같은 일들 중에 이제는 우리가 가진 시간과 자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도 가늠하고 결정을 해야한다. 때마침 요 근래 '남편은 진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묻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재밌는 것은 내 진로보다 남편 진로를 더 궁금해 한다는 것. 나야 뭐 워낙 똑부러지게 잘 할거라고 믿으셔서 그런거라고 믿고 싶긴 한데, 사실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한 30분은 설명해야 하는 나에 비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편은 '어~ 내가 목사들은 좀 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질문을 들은 내 마음 속에 '그러게, 내 남편은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인건가'라는 의문이 남는다는 것이다. 분명 연애할 때도 묻고, 결혼하고 나서도 묻고 그 때마다 자세히 설명도 듣고 동의도 되고 열심히 잘 살아봐야겠다는 다짐까지 했던 것 같은데, 뒤돌아서면 또 아리송하다. 내 해석력과 상상력의 문제인걸까, 남편의 설명력의 문제인걸까. 아리송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보면 '내가 비젼도 없고, 미래에 대한 준비도 없는 남자랑 결혼한거 아닌가'라는 불안함이 문득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참내, 나 진짜 이상한 여자다. 그러는 나는 뭐 뚜렷한 비젼 있고 미래에 대한 준비 되있나.' 싶은 생각이 떠올라 참 다행이긴 하다. 


남편이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 있어도 몇 년씩 수발을 들며 그의 신념을 지지해줬다는 아무개씨의 부인 같은 그릇은 못 되어서, 아마 앞으로도 종종 저 남자의 미래를 의심하며 책 읽는 척 하고 소파에 앉아있다가 남편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지긋이 노려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럴듯한 자리 하나씩 차지해보기 위해 불행속으로 성실히 뛰어들어가는 이 시대에서 그 대열에 끼지 않기로 결심한 우리 둘의 삶의 자리는 기본적으로 불안한 것이 맞지 않겠는가. 남들이 보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이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신념이 있고, 희미한 빛줄기 같은 희망이 있고, 아름답고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있고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났기에 결혼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 둘이 함께 오래 즐겁게 걸어가려면 상대방의 꿈을, 미래를 내 뜻대로 해보려는 생각은 확실히 버려야겠다. 결혼해서 제일 처음으로 배운 점이 배우자의 밤잠 자는 패턴이 내가 보기에 잘못되어 보인다고 해서 고쳐주려고 노력해봤자 기분만 상하게 한다는 것, 나와 결혼하기 전 이미 그 정도는 혼자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남편의 미래는 남편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지라도, 혹은 실패할 지라도 말이다. 

대신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은 나의 것으로 삼겠다. 

2016. 12. 6. 00:48.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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