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1. 

D-33 


드디어 남편을 먼저 보냈다. 다행히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것은 아니고 러시아로 보냈다. 


왜 둘이 같이 떠나지 않고 남편이 한 달 먼저 떠나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질문을 받기 전에는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질문을 받고 보니 그러게 왜 그랬나 싶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한 가지의 이유 보다는 자잘한 여러가지 이유가 합쳐져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 신혼여행 때 남편은 파리를 가고 싶어했는데 내가 반대했더니 자기 뜻을 접으면서 그럼 나중에 자기 혼자 파리를 보내달라고 하더라. 그럴 일이 있겠나 싶어서 알겠다고 했는데 그럴 일이 꽤 빨리 생긴 듯 하다. 파리 뿐만이 아니라 이미 유럽여행을 두 번이나 한 나에 비해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 많은 남편이 어차피 사직하고 쉬고 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찍 가서 먼저 여행하고 있기로 했다. 나는 아직 휴직이 시작되려면 한 달이 더 남았고, 이미 여행한 나라들을 또 가기 보다는 북유럽 나라들의 교육현장을 탐방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또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솔직한 내 마음 중에 하나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이다. 뭐라도 좀 독특하게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남편과 6주 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각자 여행하다가 만나면 할 이야기도 더 많을 것 같고 그래서! 


그런데 이렇게 시차를 두고 출발하기로 한 결정이 참 많은 것에 영향을 미쳤다. 한달 전부터 남편은 본격적인 출국 모드에 들어갔다. 매일매일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 빼놓지 않고 준비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그에 비해 나는 일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마치 영영 여행은 떠나지도 않을 사람인 것처럼 지냈다. 애써 그의 모드에 맞춰보려고 했지만 당장 내 눈 앞에는 여행가기 전 한국에서 잘 마쳐야 할 일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몇 주 전 미국 출장을 위해 비행기에 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보니 지난 6개월 동안 남편의 생활, 그리고 그 마음이 어땠을지 내가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누군가는 일 안하고 쉬고 있으니 좋겠다고 말하겠지만 생산성 신화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쉰다는 게 어디 그리 말 만큼 쉬운 일이겠는가. 몸은 쉬어도 내적갈등은 심했을거다. 어디 말할 데도 없고, 가장 가까이 있다는 아내도 잘 안 들어주고. 심지어 출근 안하니 집안일을 좀 더 많이 해달라는 무언의 압박도 주고. 


출장을 다녀오니 어느덧 남편의 출국이 2주 남짓 남아있었다. 시차적응이 안되어서 초저녁부터 잠에 골아 떨어지는 생활을 1주일 정도 하고, 이제 1년 동안 보지 못할 양가 가족들과 한 주씩 여행을 다녀오니 내 남편을 떠나보낼 날이 정말 코앞이었다. 마지막 3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부랴부랴 휴가를 냈다. 딱히 나랑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사람들 만나러 다니느라 정작 나를 혼자 둔 시간이 많았지만 남편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필요할 때 내가 언제든 응답가능한 상황이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별이 이렇게 간단한가. 배낭 매고 출국장 앞에서 사진 몇 장 함께 찍고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 긴장이 풀리고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남편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나의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우리 둘의 여행은 시작됐다는 사실이 묘하게 모순적인 느낌을 주었다. 작년 4월 무심코 던진 말로부터 시작된 어찌보면 터무니 없는 여정이 진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설렘과 각오가 있는게 아니라 약간 어리둥절하다. 


시엄마와 같이 쇼핑을 하고 차를 마시고 조카들을 만나고 저녁까지 먹을 뒤 집에 돌아왔다. 집 문을 여니 기분이 멍하다. 나는 어제와 다름 없이 이 집에 있는데, 이제 그는 없다. 여름 수련회 가듯이 몇 일 뒤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365일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30일 뒤에는 나도 오랫동안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준비를 마치고 그를 뒤따라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두렵다. 


우리는, 남편은, 나는 진짜 이걸 원한게 맞았을까? 


지난 몇 일 동안 그를 보면서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고, 내가 억지로 그를 이 상황에 몰아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두려울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헤어진 지 약 10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첫번째 도시의 숙소에 잘 도착했다고 한다. 기분이 어떠냐고 했더니, 솔직하게 말해도 되냐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하하 하고 웃어 넘겼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완전히 잘못 맨 단추라는 것이 있을까? 집 문을 열며 느낀 심란함이 더 증폭됐다. 지금 블라디보스톡에 함께 있었다면 ‘우리 지금 뭐한거야?’, ‘잘못되는 일이란 없을거야’하며 서로 이야기로 풀었겠지만 지금은 그의 생각을 상세히 알 길이 없으니 더 불안하다. 


뭔가 좀 비장해진다. 늘 이게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대단하다고 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대답하곤 했지만 이게 정말 별 일이 아닌게 아니고, 큰 용기와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도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바꾸는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모든 사태가 다 벌어지고 난 지금에서야 실감한다. 


나는 원래 이렇게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야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지만, 이런 각오와 결심, 두려움과 긴장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을 가진 남편은 장기여행 아이디어가 나오고 결정되고 추진되는 동안 얼마나 많이 두려웠을까? 그에게는 씩씩한 내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이겨낸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런데 저질러 버렸다. 이제 어쩌지?!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심란해지자면 한 없이 심란해질 수 있는 문제. 평소라면 남편에게 징징거릴 수라도 있겠지만 지금은 들어줄 사람도 없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씩씩한 생각이 올라온다. 


시작이야 어떻게 됐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의 여행 동기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누가 판단하겠는가. 이 시간과 돈을 쓸 만큼 이 여행이 중요한지, 타당한지 우리 스스로만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이유인지에 더 신경을 쓴 것은 아닌가 싶다. 


즐기자. 잘못 보낸 시간이란 없겠지. 즐기는 것만이 이 시간을 옳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더 이상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다가올 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지난 1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일하고 살고 배웠다. 여행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나고 대화하고 배우고. 떠돌며 기도하며 깊이 들어가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다짐하게 된다.



2018. 10. 1. 22:58.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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