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편과 좋은 대화를 나눴다. 어젯밤 1박2일의 일정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남편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지만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엔 어젯밤에 들어주지 못한 미안함까지 더해서 더 열심히 들어주었다. 

오늘 아침의 대화는 B에 관한 것이었다. 요즘 내 머리 속에서 가장 골칫덩어리인 꽃치너는 B이다. 친구들에게 관심 없고, 특별히 갈등이 없는 지금도 친구들의 호의와 배려를 무시하며 여전히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 C가 특별히 B를 위해 소금을 친 계란후라이를 해줬을 때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짧은 땡큐 한마디만을 남긴 것이 나는 너무 뇌리에 박혔다. 도대체 왜 그렇게 친구들이 싫은걸까. 

B에게 나머지 꽃치너들은 참 우스운 존재들일 것이다. 학교에서 보면 거의 찐따 수준? 감히 자기와 놀지 못하거나 친절을 베풀어도 자기가 조금 베풀어주면 고마워해야할 존재들? 그런데 꽃친에 와서 함께 어울리라고 하니 그 상황이 얼마나 싫겠는가. B에게 있어서 친구들에게 매겨진 계급은(본인은 절대로 부정하겠지만) 공고한 성이다. 3등급 아이들이 1등급인 자기에게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 자신도 똑같이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갈등도 심하게 겪었다. 

새로운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사물도 경험도. 자기가 알고 있는 딱 그만큼의 틀 안에서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아이도 참 강적이다. 청소년들은 경험의 폭이 좁다보니 그런 폐쇄적인 성향을 띄는 것이 아주 희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 경험을 벗어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 경계가 깨진다. 충격을 받기도 하고 열병을 앓기도 하지만 그 틀을 깨고 한 꺼풀 밖의 세계로 나오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내가 생각한 게 다가 아니었구나. 내가 몰랐던 것이 있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내가 익숙한 이 경험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나도 아직 그렇고, 더 나이가 든 사람들도 그것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인간관계, 나만의 생존방식 등을 겨우 조금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니.. 다시 새로 배워야 하다니.. 그 과정에서 비웃음을 당할수도, 비난을 받을수도,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안전한 침대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을 것이다. 그게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본능도 무의식 중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조금 두렵긴 하지만 밖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겪어내야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그 두 마음 중에 어느 마음이 더 크냐에 따라서 때로는 도전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방어적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항상 방어적이기만 한 B는 두려움이 너무나 큰 것이겠지? 어떻게 그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

안전과 도전의 공존. 

도전하기 위해서는 안전이 꼭 필요하다. 아이들이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안전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안전을 빼앗아 갔을까? 

2017. 10. 24. 01:06. RSS feed. came from other blogs. Leave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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